신비한 TV 서프라이즈 하늘이시여 김희집 노처녀 신덕빈 딸 신씨 조선시대 정조 노총각 노처녀 혼인프로젝트 김신부부전 돈500푼 포목 두끗 결혼비용

카테고리 없음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하늘이시여 조선시대 혼인 프로젝트1791년 2월 어느 날 정조는 한성(漢城) 오부(五部)에 명을 내려 경제적 어려움으로 혼인하지 못한 백성들에게 돈과 포목을 지원한 후 그 결과를 매달 보고하게 했다. 당시 한성부에는 이러한 지원이 필요한 노총각과 노처녀가 총 281명으로 파악되었으며, 혼인 프로젝트 추진 결과 1791년 5월까지 남녀 한 명씩을 제외하고 모두 혼인할 수 있었다. 


 결혼하지 못한 김희집이라는 남자는 현감을 지낸 김사중의 서손(庶孫)으로 28세였다. 광주에 사는 처자와 정혼하였지만 그가 서얼임을 알게 된 처녀의 집으로부터 일방적으로 파혼당한 아픔이 있었다. 결혼을 못한 여인은 신씨(申氏). 신덕빈의 서녀로 21세의 노처녀였다. 그녀는 이원교의 아들과 1791년 7월22일 혼인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이씨 집안의 배신으로 파혼을 맞았다. 

두 남녀는 파혼의 상처를 가진 채 자의반 타의반으로 혼인할 수 없는 상태에 있었다. 전통시대에도 결혼은 경제적인 문제가 결부되어 ‘가난한 처녀가 혼인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세 가지 중 하나로 꼽혔다. 한쌍의 남녀가 혼인하지 않고 남아 있다는 소식을 접한 한성판윤(지금의 서울시장) 구익과 한성부 관리들은 난리가 났다. 정조가 야심차게 추진한 노총각 노처녀 혼인 프로젝트에 오점을 남기게 된 것이니 그럴 만도 했다. 모두가 전전긍긍할 때 절묘한 제안이 있었다. “그 두 사람을 결혼시킵시다.

” 한 방에 고민을 해결할 수 있는 기막힌 방법이 아닌가! 구익이 두 사람의 결혼을 적극 추진하면서 그 사실을 정조에게 보고했다. 정조는 프로젝트를 완벽하게 성사시키기 위해 그간 경제적 지원에 그쳤던 정책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었다. 이 두 사람의 혼인을 위하여 전폭적인 지원과 함께 국가가 혼인을 직접 주관하게 했다. 



일반 백성의 혼인을 위하여 국가 전체가 나서게 되는 사상 초유의 대형 혼인 이벤트가 펼쳐진 것이었다. 김희집과 신씨의 혼인 이벤트는 당시 큰 화제를 낳았다. ‘김신부부전’을 비롯하여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일성록, 목민심서 등에 두 사람의 결혼 사실이 기록되었고, 한양의 저잣거리에 소문이 파다하였다. 두 사람은 1791년 6월12일 혼인에 성공했다. 야심차게 추진했던 혼인 프로젝트가 완벽한 결실을 맺게 된 것에 정조도 뛸 듯 기뻐했다. 정조는 내각검서 이덕무에게 “이 같은 기이한 일에 아름다운 전(傳)이 없어서야 되겠는가?  

그대가 한 통을 기록하여 김씨, 신씨 부부의 전을 만들어 아뢰라”고 지시했다. 정조의 명에 이덕무는 김희집과 신씨부인의 혼인 과정을 ‘김신부부전’(金申夫婦傳)으로 지어 내각 일력에 실었다. 두 사람의 신상정보, 노총각과 노처녀가 되기까지의 상황, 혼인에 이르게 되는 과정, 혼례 절차와 장면 등을 상세하게 기록했다. 마지막에 자신의 평을 달았다.



RSS Feed

https://praise1004.tistory.com/r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