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한 TV 서프라이즈 박호생 마지막 시험 유생 과거시험 장원급제 출세 코디네이터 조선학원 사교육의신 강경룡 전설의스타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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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시험 조선시대 과거시험에도 코디네이터 조선시대 땐 과거에 합격하지 않으면 사람취급을 받지 못했다.  


사교육의 원조는 경당 ‘과거=출세’의 등식이었으니 유생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과거에 합격해야 했다. 그러니 잘 가르친다는 사교육 선생들을 찾아다녔던 것이다. 못말리는 교육열이었니 만큼 사교육의 뿌리 또한 깊다. 고구려 때 유행한 ‘경당’까지 이어지니 말이다.  “고구려에서는 문지기·말먹이의 집에 이르기까지 거리마다 큰 집을 지어 경당(경堂)이라 하며 자제가 결혼하기 전에는 밤낮으로 이곳에서 책을 읽고 활쏘기를 익였다.”(<구당서> <신당서> ‘고구려전’)  신라에도 개인교사가 있었다. 원효대사의 아들인 설총(617~686)이 대표적이다.  “설총은 구경(九經·유교 9가지 경전)’을 이두로 풀어 제자들을 가르쳤다. 그래서 지금까지 학자들이 설총을 종주로 삼고 있다.”  이같은 사설학원 혹은 학교는 고려에도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고려에는 마을마다 경관(經館)과 서사(書社)가 2~3곳이 있고, 미혼의 자제들이 무리를 지어 경서를 배웠다.”(<고려도경>)  ‘마을의 경관과 서사’란 사학 혹은 학원의 형태로 운영됐을 것이다.   


그러니 과거합격에 목을 매는 것은 당연했다.  오죽했으면 영남의 유생들은 추풍령은 거치지 않고 문경새재나 궤방령으로 넘었다지 않은가. 하기야 추풍낙엽처럼 떨어진다는 추풍령보다는 경사스런(慶) 소식을 듣는다(聞)는 뜻의 ‘문경(聞慶)새재’나, 합격방이 붙는다는 뜻을 지닌 ‘괘방령(掛榜嶺)’을 통해 한양으로 갔을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떨어질 낙(落)’자는 절대 써서는 안될 금기어였다. 그러니 어떤 유생이 낙지를 구워 다른 유생에게 전해주면서 “‘입지’ 구운 것 좀 드시오”라고 했단다. ‘떨어질 낙(落)’ 발음이 아니라 ‘설 립(立)’자를 써서 ‘낙지’를 ‘입지’라 한 것이다. 입지(立志), 즉 뜻을 세운다는 뜻이니 얼마나 합격이 간절했으면 낙지를 입지라 했을까. 이 뿐인가. 어떤 유생은 시험 때마다 고양이가 지나가면 합격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고양이가 보이지 않았다.  어느 밤에 병든 고양이가 점포 문밖에 쪼그리고 앉아있자 부채를 휘둘러 자기 앞을 가로질러 가게 했다. 유생은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쉰 뒤 숙소로 돌아갔다.  신숙은 마침내 1568년(선조 2년) 별시에 급제하는 영예를 안았다. 

전설의 스타강사  고려의 전설적인 스타강사 고려 충렬왕대의 인물인 강경룡.

 그 전설의 이름은 왕조가 바뀐 조선 초기까지 ‘사교육의 신’으로 추앙됐으니 말이다.   

 1305년(고려 충렬왕 31년)의 일이다. 충렬왕이 유생 강경룡을 치하하고 곡식을 하사했다. <고려사절요>는 이 이유를 설명한다.

 “선비 강경룡이 집에서 글을 가르쳤다. 그의 제자 10명이 성균시에 모두 합격했다. 합격자들이 스승 강경룡을 찾아 인사를 드리느라 떠들썩한 소리가 밤새도록 그치지 않았다. 강경룡의 동네에 살고 있던 익양후 왕분(신종의 아들)이 그 소식을 듣고….”

 얼마 후 익양후 왕분이 충렬왕을 알현했을 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강경룡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자 충렬왕이 강경룡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한 뒤 하사품을 내렸다.

 “이 노인(강경룡)은 비록 벼슬은 하지 않았지만 사람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구나. 그의 공이 얼마나 큰가.”         

 요즘으로 치면 강경룡이 가르친 제자 10명이 모두 서울대나 고시에 합격했다는 소리니 얼마나 대단한 강사인가.   

 그런데 이 일이 있은지 131년이 지난 1436년(세종 18년), 강경룡의 이름이 다시 출현한다. 

 지성균관사 허조가 세종대왕에게 아뢸 말씀이 있다고 머리를 조아렸다. 

 “고려 충렬왕 때 강경룡이라는 사람이 가르치는데 게을리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포상을 받았습니다. 


지금 유생 유사덕은 집에 서재를 마련, 어린아이 수십명을 가르치고 있고, 경

상도 용궁사람 박호생도 10여 년 동안이나 집에서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원컨대 (강경룡의 예로) 이 사람들을 포상하신다면….”(<세종실록>)

세종은 허조의 상언을 좇아 유사덕과 박호생을 포상했다. 


강경룡이라는 사람의 사립학교(혹은 사설학원)에서 공부한 10명이 모두 과거에 급제했다는 소리다. 


그래서 합격자들이 스승에게 몰려가 온 동네가 밤새도록 들썩거렸다는 이야기다.


강경룡과 같은 동네에 살던 익양후가 그 소리를 듣고 다음 날 충렬왕에게 전하자 충렬왕이 칙명을 내려 치하한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왕조가 바뀌었는데도, 강경룡은 ‘모범사례’로 칭송의 대상이 됐다는 사실이다. 


“1436년(세종 18년), 지성균판사 허조가 임금에게 아룄다. 


고려 충렬왕이~강경룡을 포창한 일이 있사온데…. 


지금은 유생 유사덕과 박호생이라는 사람이 자기 집에 서재를 차려놓고 수십명의 어린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들을 <육전(六典)>에 따라 특별히 포상하신다면….”


허조는 “서재(書齋)를 설치, 학생들을 가르친 사람에게 상을 주는 것이 법전에 있다”고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부연설명했다. 


“고려 시대부터 한량·유사들이 사사로이 서재를 만들어 학생들을 가르친 사람이 있었습니다. 성조(조선)에 와서도 서울엔 국학(성균관 및 4부학당), 지방엔 향교를 각각 두었지만 사사로운 서재를 만드는 법을 시행하지 못했습니다.” 


허조는 국가의 힘이 닿지 못하는 곳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사립학교를 장려하자는 취지의 상소를 올린 것이다. 

세종도 허조의 말을 좇아 유사덕과 박호생 등이 세운 ‘모범 사학(혹은 학원)’을 표창했다.

 만고의 성군이라는 세종께서 ‘사교육’을 장려하고 있다니…. 

한편으로 생각한다면 예나 지금이나 공교육의 한계와 붕괴를 웅변해주는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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