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한TV 서프라이즈 우리나라 최초 여성 경제학사 최영숙 남편 청년 로이 인도남자 스웨덴유학여성 마하드젠나 한여자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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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숙은 실존 인물이다. 이화학당을 졸업하고 중국에서 3년간 유학 생활을 했으며, 안창호의 흥사단에 가입했다. 스웨덴의 여성학자 엘렌 케이의 책에 감명받아 여성 노동운동가를 꿈꾸며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스웨덴에 도착해 스톡홀름대학 경제학부에 입학했다. 아시아 최초 스톡홀름 여성 유학생이었다.



스웨덴 구스타프 아돌프 황태자의 신임을 얻은 그녀는 스웨덴에 남으라는 황태자의 권유를 사양하고 유럽, 그리스, 이집트를 거쳐 귀국하던 중 인도의 청년 실업가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하지만 그와의 결혼을 뒤로 하고 조선으로 돌아온 그녀는 당대 신여성으로 주목받았으나 생활고와 사회의 편견에 부딪혀 재능을 펼치지 못했다. 조선 최초 소비자조합 '교남여자소비조합'을 만들어 콩나물 장사를 시작했으나 임신중독증과 영양실조로 출산 도중 사망했다. 나이 27세, 귀국한 지 5개월 만이었다.


중국 유학 시절 안창호를 흠모했던 그녀의 풋풋함과 자수, 베갯잇, 방석을 팔아 어렵게 살면서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남몰래 눈물 흘렸던 유학 시절, 인도 청년 로이와 나눈 달콤한 사랑 최영숙이 사랑한 인도 청년은 누구였을까. 당시 이 청년의 신원에 대해 엇갈린 보도를 하고 있다. ‘삼천리’는 최영숙의 일대기를 소개하면서 마치 본 것처럼 두 사람의 연애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두 사람은 스웨덴 유학시절 만났다. 어느날 최영숙이 인도 남학생과 함께 강에서 ‘뽀드(배)’를 타고 가다가 그만 배가 뒤집혔다. 이 인도 청년은 물에 뛰어들어 최영숙을 구했다.



삼천리는 “최 양은 처음 이성의 품에 안겨보았고, 그 청년 역시 이 세상에 나서 아마 처음으로 최양의 실신한 육체를 안아보았던 것”이라고 했다. 두 사람은 이후 “사랑이 변치 말기를 맹세”했다는 것이다. ‘삼천리’는 이 인도 청년이 ‘마하드 젠나’라고 이름까지 적었다.


하지만 잡지 ‘동광’의 보도는 다르다. ‘동광’은 “문제의 인도 청년은 아버지를 조선 사람으로 하고 어머니를 인도 여자로 한 혼혈아”라며 ‘Mr. Row(盧氏·노씨)’라고 했다. 두 사람은 이집트 카이로에서 인도로 가는 배 위에서 처음 만났고, 최영숙은 ‘노씨’의 도움을 받아 인도에서 체류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동광’ 역시 소설 형식으로 두 사람의 만남을 극화해 서술하고 있다.


아이 출산에 대한 이야기도 엇갈린다. ‘동광’은 “동대문 부인병원에서 모체(母體)가 위험하다는 의사의 진단으로 산아(産兒)를 집어내고 세브란스 시료실(施療室)에 옮겼다가 4월 23일 오전 11시 반 한 많은 세상을 떠나게 된 것”이라고 했다. 반면 ‘삼천리’는 “1932년 3월 최영숙 양은 인도인의 씨인 아이를 낳았습니다. (중략) 그만 산후의 조섭이 불량하였는지 간난애는 열을 발하며 수일동안 앓더니 끝끝내 아버지 얼굴조차 보지 못하고 죽고 말았습니다”라고 썼다.


최영숙은 아이가 사망한 직후 “그만 자신이 병이 덜컥 들어 동대문 병원에 입원하였던 것”이라고 했다. ‘동광’은 아이를 낳다가, ‘삼천리’는 아이를 낳은 직후 최영숙이 사망했다고 한 것이다.


최영숙이 사랑한 인도 청년이 누구인지는 명확치 않다. 그러나 최영숙은 귀국 후 쓴 글에서 이 인도 청년에 대해 ‘힌트’를 주고 있다. 최영숙은 조선일보 1932년 2월 3일부터 7일까지 5회 연재한 ‘인도 유람’이란 글에서 인도 청년에 대해 살짝 언급했다. 그는 2회 기사에서 “나이두 여사의 생질이 되는 이로 애급(이집트)에서부터 우연히 동행이 되었고, 그동안 나에게 많은 도움을 준 친구”라고 이 인도 청년을 소개했다. 자신이 회견했던 사로지니 나이두의 조카였다는 것이다.


최영숙은 식민지 조선 최고의 여성 엘리트였다. 그는 영어·중국어·스웨덴어·일본어·프랑스어에 능통했다고 한다. 하지만 귀국 후 그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생활을 했다. 서대문 밖 교남동에 작은 상점을 차리고 배추·감자·미나리 등을 팔며 생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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